기후변화가 우리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평균기온은 25.6℃로 평년보다 1.9℃ 높았으며, 열대야는 20일 넘게 이어져 평년의 세 배를 넘겼다. 비는 대부분 6~7월 장마철에 몰려 내렸고, 마치 열대지방의 국지성 호우처럼 지역마다 갑작스러운 폭우가 반복되어 인명피해까지 발생했다. 이런 이상기후는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라, 해마다 반복되는 일상이 되고 있다.
기후변화의 영향은 곧바로 농산물 가격에 나타난다. 2023년에는 배추값이 크게 올라 ‘금배추’라는 말이 다시 나왔다. 고추도 이상기온과 잦은 비로 병해충이 퍼지면서 수확량이 크게 줄었고, 가격은 두 배 이상 올랐다. 작물마다 기후 스트레스로 인한 피해가 반복되고 있고, 농업인과 소비자 모두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다.
문제는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후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그 강도와 빈도는 점점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예전 방식의 농사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날씨에 대응하기 어렵다.
수확량이나 품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도 힘들다. 이제는 새로운 관점과 기술로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기후탄력성(Climate Resilience)’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기후탄력성이란 작물이 고온, 가뭄, 폭우, 염분 피해, 병해충 같은 다양한 기후 스트레스를 받아도 생장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런 작물은 날씨가 불안정해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수확할 수 있어서, 식량 안보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기후위기시대 농업, 예측 아닌 설계의 대상
기후탄력성을 과학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핵심 기술이 바로 ‘표현체(Phenomics) 기술’이다. 이 기술은 작물의 생김새, 생리 반응, 환경 자극에 대한 반응 등을 고해상도 이미지, 센서 데이터, 인공지능 분석을 통해 정밀하게 수치로 나타내는 기술이다.
작물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응을 숫자로 분석하고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품종을 고르고 개량하는데 더 빠르고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잦은 폭우로 뿌리가 썩거나, 고온 때문에 열매가 제대로 맺히지 않는 피해는 겉으로 보기엔 비슷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토양의 수분 센서와 분광 이미지 등을 활용하여 광합성 효율이나 스트레스 반응을 정밀 측정하면 각각 어떤 생리 반응에서 피해가 생겼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 이를 통해 어떤 품종이 어떤 조건에서 잘 견디는지를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기후탄력성이 높은 작물 품종을 개발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혹독한 기후 조건으로 잘 알려진 북유럽 국가들은 이미 표현체 기술을 활용해 기후에 잘 적응하는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핀란드의 ‘NaPPI’, 스웨덴의 ‘Phenocave’ 같은 고정밀 분석 시스템을 이용해 일조량이나 온도가 부족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을 선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농업 정책과 연결할 필요가 있다.
이제 농업은 더는 ‘하늘만 믿는 산업’일 수 없다. 데이터 기반 분석, 기술 중심 품종 선발, 기후 회복력 강화가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 표현체 기술은 이런 변화에 꼭 필요한 도구이고, 농업이 기후 위기를 이겨내는데 실질적인 해답이 될 수 있다.
컴퓨터 과학자인 앨런 케이(Alan Kay)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 위기 시대에 농업의 미래는 단순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설계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술의 가능성이며, 우리가 실행해야 할 것은 그 기술을 통해 변화를 만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