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눈이 욱신욱신 쑤셔 안과병원에 들렀다. 다행히 큰 병이 아니라 알레르기성이란다. 의사는 “환절기에는 몸을 무리하게 놀리지 말라”고 조언했다. ‘눈’과 ‘환절기’와 ‘무리’가 무슨 상관일까? 마땅한 연계성이 떠오르지 않아 구태여 질문을 했다. 의사는 쉽고 짧고 친절하게 그 이유를 알려 주었다.
“계절이 바뀔 때 질병이 찾아오는 이유는 ‘몸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런 몸들은 대개 면역력이 떨어진 경우입니다.”
즉, 의사는 ‘당신 몸은 과거보다 면역력이 떨어져 약체가 돼가고 있으니 건방지게 옛날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고마운 의사였다.
며칠 뒤 한 모임에 나가 ‘눈과 환절기와 무리와 면역력’에 관한 썰을 풀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벌에 관한 썰로 응대했다. 우리나라는 밀원(蜜源;꽃밭)이 작아서 믿음직한 ‘한봉가(韓蜂家)’ 찾기가 너무 어렵다는 얘기부터, ‘진정한 벌꿀’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프로폴리스야말로 면역력 증강에 가장 효과가 좋은 천연식품이고, 양봉(養蜂)이야말로 가장 친환경적인 산업이며, 벌이야말로 인간들이 존경하고 따라야 할 모범적 동물이었다. 그가 전한 벌들의 삶 일부를 옮긴다.
“일벌은 20일밖에 못 사는데 수벌은 5개월가량 삽니다. 수벌은 노는 게 일이죠. 5개월 동안 한량처럼 놀다가 여왕벌과 딱 한 번 교미를 하고 죽지요. 물론 여왕벌에게 선택받는 수벌은 딱 한 마리이고 나머지 수벌들은 5개월 동안 놀다가 교미 한번 못해 보고 죽는 겁니다.”
“일벌은 수벌보다 왜 그리 빨리 죽지요?”
“기본 수명이랄까, DNA랄까… 하지만 일에 지쳐서 빨리 간다고 볼 수도 있죠. 날개가 헤져서 죽으니까.” (아아, 날개가 헤져서라니… 모두들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날마다 노는 수벌들을 보면서 심리적 스트레스도 많았겠지요?”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닙니다. 자기 역할을 하는 거니까. 노는 것도 중요한 역할 아니겠어요? 만일 수벌들을 다른 데로 쫓아버리면 일벌들 중 일부가 노는 벌로 변합니다. 일종의 시스템인 거죠.”
꿀 애호가의 벌 예찬론은 계속됐다.
‘벌은 꽃이 없으면 살 수 없고 꽃은 벌로 인해 밭을 이룬다. 무엇보다 벌은 분뇨 없는 유일한 동물이라 냄새는 물론 탄소배출량 걱정이 없다. 면역력 증강에 좋은 프로폴리스를 생산해내는 산업이다 보니 양봉업자들은 또 정력이 좋다. 평생 꽃밭을 찾아다니며 꽃을 존중하는 남자들, 양봉업자들은 여자에게 사랑받는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은근히 쓸쓸해졌고 꽃을 본 지 얼마인가 되새기게 됐다. 벌을 무서워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 아닌가, 생각도 바뀌었다.
안과에서 진료 대기 중에 고객용 책자를 훑다가 본 흥미로운 리서치 기사 하나. 영국의 한 기관에서 세계 101개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세계인이 공통으로 생각하는 아름다운 단어’ 70개 가운데 몇 개를 전한다.
1위는 어머니(Mother). 압도적이다. 2위 열정(Passion), 3위 미소(Smile), 4위 사랑(Love)… 대략 이해 가는 순서다. 그러다 중간쯤 이르러 ‘빵’이나 ‘호박’ 등의 먹거리, ‘집’이나 ‘옷’ ‘우산’ 등의 생활필수품이 등장한다. 놀랍게도(당연하게도?) 70개 단어 중에 ‘아버지(Father)’는 없다. 세계인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호박이나 우산보다 못한 존재라고. 평생 일만 하는 아버지들, 꽃을 돌아볼 겨를이나 있을까. 쯧쯧.
▶유민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랐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골을 잊지 않았고, 농업 농촌을 주제로 한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농업-식품-음식을 주제로 한 푸드 칼럼을 다수 매체에 게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