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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기획

정책에 좌우된 한국 무기질비료 연대기

[창간 7주년 기획] 국내외 비료시장 동향과 전망
2. 국내 비료시장(생산) 동향

1967년말 우리나라 비료생산 능력 113만톤
영남화학·진해화학·한국비료 세워 자급시대로
1977년 남해화학 가동…시장의 주요 분기점
우리나라 비료 생산능력 300만톤으로 확충
1988년 정부 비료공급 사업 농협으로 이관
공급물량과 가격 경쟁입찰로 자유판매제도
1993년 UR 협상 타결과 WTO 체제 출범
소비자 위주 유통·판매 등 시장지향적 재편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무기질비료 사용량 확대 시기를 지나, 국제 원자재가격 급등에 따른 무기질비료 가격 인상으로 대체비료로서 친환경농자재 지원 시기로 변화되었고 최근에는 탄소중립 실천을 위한 비료 사용 시기로 이동하고 있다. 국내 무기질비료시장 동향과 무기질비료 생산량은 비료정책 변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왔다. 국내 비료시장을 연대기의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무기질비료 생산량은 정부의 비료정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왔다. 일제시대 이후 식량증산의 최대 유효수단으로서 비료의 안정적 공급은 농정의 최우선과제였다. 1945년 해방과 분단, 1950년 전쟁을 거치면서 부족한 비료의 국내 공급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비료공장 준공을 서두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외국자본의 도입도 이뤄졌다.


비료가 부족했던 시기에 정부의 비료 공급정책은 배급 형식의 관수 공급체제였으며 비료 가격 안정이 농가소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됨에 따라 가격은 정부 고시 체제로 결정됐다. 비료 생산기반 확충과 식량 자급자족 달성을 위해 1960년대 정부 주도로 비료공장을 건설하여 충주비료(1비), 호남비료(2비)가 준공됐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영남화학(3비), 진해화학(4비), 한국비료(5비) 등 대단위 비료공장이 각각 준공됨으로써 1967년말 우리나라의 연간 비료생산 능력은 실중량 113만톤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정부 주도의 대규모 비료공장 건설 이외에도 순수 민간 비료공장도 건설되었는데 경기화학(현 KG케미칼)(1954년), 풍농비료(1962년), 조선비료(현 조비)(1955년), 한국카프로락탐(현 카프로)(1969년) 등이 건설됐다.
1967년에 영남화학, 진해화학, 한국비료가 일제히 준공 가동됨으로써 비료의 수입 의존에서 국산 자급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또한 경기화학 등의 비료공장이 가동됨으로써 1968년 자급률이 102.0%에 이르고 우리나라는 비료의 자급단계를 넘어서 비료를 수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내 생산이 부족한 인산질비료와 칼리질비료는 계속 수입을 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내 생산이 부족한 칼리질비료를 제외한 질소비료와 인산질비료는 국내 수요를 완전히 충족하고도 남았다. 1973년을 기점으로 통일벼 등 다비성 신품종의 개발, 보급 확대와 단위면적당 시비량이 증가해 비료 수요량은 크게 늘었으나, 과다 수출과 농협이월 재고량의 감소로 일시적인 비료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1974년부터는 비료를 다시 수입했으며 비료 수출도 중단됐다. 이후 1976년부터 비료 재고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비료 수입은 다시 중단됐다.


1976년을 기점으로 비료 자급이 달성된 이래로 기존 비료회사의 생산증가와 1977년 남해화학의 준공 가동으로 국내 비료의 잉여분이 발생했으나 같은 해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시장으로 수출하면서 잉여분의 처리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81년에 들어와서 해외 수출이 감소되고 국내 비료 수요량도 감소돼 농협보유 비료 물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남해화학의 가동은 한국 무기질비료 시장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남해화학이 가동되기 전인 1976년까지는 총생산량이 197만2000톤으로 요소가 74만7000톤, 황산암모늄 16만7000톤, 인산질단비 22만3000톤, 복합비료가 83만5000톤이었다. 특히 복합비료 중 22-22-11 제품이 58만4000톤으로 복비의 70%를 차지했다.


남해화학 설립 이전에는, 요소는 충주비료와 한국비료가 중심이 돼 내수 비료 물량을 공급했고 복합비료는 영남화학과 진해화학이 공급했다. 1977년 남해화학(7비)이 중화학공업육성 정책의 일환으로 준공 가동되면서 비료의 완전한 자급자족이 달성됐고 수출에도 여력이 발생하는 계기가 됐다. 남해화학 가동으로 우리나라 비료 생산 능력은 300만톤으로 확충됐고 생산량도 1980년대 중반 절정에 달했다. 생산량이 수요량을 충족하고도 남아 정부는 적정 시비를 유도하는 한편, 비료 재고 증가는 수출시장 진출을 촉진했고 1980년대부터 비료산업은 수출전략산업으로 급부상하게 됐다.


복합비료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1980년대에는 총 생산량 285만4000톤 중 요소 95만8000톤, 황산암모늄 18만6000톤, 인산질단비 21만8000톤, 복합비료는 149만3000톤으로 이중 21복비(21-17-17, 17-21-17)가 51만9000톤이며 DAP(18-46-0)가 73만톤, 기타 복비가 21종류로 24만4000톤이 생산됐다. 남해화학이 설립된 후 정부가 비료사업을 관장하던 1987년까지 내수비료의 70% 이상을 남해화학이 공급하면서 비료의 적기 안정공급을 주도했다.


1988년부터 정부의 비료공급 사업이 농협으로 이관되고 공급물량과 가격이 경쟁입찰을 통해 결정되는 자유판매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내수 비료 안정을 위한 남해화학의 비중은 더욱 막중해졌다. 1989년 국내 비료의 약 72%를 남해화학이 공급했다. 이는 2차 비료공업 합리화 조치에 따라 민영화된 일부 비료회사가 비료 가격의 인상을 위해 출하를 기피함으로써 남해화학이 수출을 중단하고 생산된 물량 대부분을 내수 비료로 우선 공급했기 때문에 국내 공급 점유율이 높아졌다.


정부가 비료공업 합리화 조치를 시행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비료의 잉여 문제였다. 당시 정부는 우리나라의 비료 공급능력 246만8000톤(요소 123만톤, 복비 123만 8000톤)에서 수요 165만톤(요소 65만톤, 복비 100만톤, 수출 15만톤)을 제외한 81만 8000톤(요소 58만톤, 복비 23만8000톤)의 잉여분이 발생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국내 비료업계의 생산과잉으로 잉여분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경지 및 시비량의 확대는 제한돼 국내 수요 증가 요인이 없었다. 수출 역시 세계적인 공급 과잉, 가격경쟁력 상실, 중동 산유국의 비료공장 건설, 그리고 주요 수입국의 생산시설 확장 등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와 함께 과거 50년 동안 정부의 비료가격 및 유통에 대한 개입 정책은 식량 증산에 크게 기여했으나 과다시비를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해 비료 소비량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했다. 1990년대 접어들어 비료 등 농업 투입 자재의 비용 절감을 통한 경영비 인하는 국내 농산물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하나의 수단으로 등장했다. 비료관리법 제9조에 의해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이 비료의 수입, 수출, 판매를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그동안 비료 원료인 암모니아, 납사, 인광석, 염화칼리 등을 업체가 현지와의 직접계약을 통해 수입했는데 완제품 비료의 수입은 용성인비 외에는 없었다.


1993년 UR 협상의 타결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출범으로 국내 농업 정책은 국제적 규범과 원칙에 맞춰야 하며 농업 보조금은 감축할 의무를 지니게 됐다. 농산물시장의 완전 개방으로 인해 국내 농업은 과거 생산 위주에서 소비자 위주의 유통·판매 등 시장 지향적인 구조로 재편돼 왔다. 1997년 OECD 가입으로 우리나라 농업은 더욱 국제화·개방화 대열에 서게 되어 선진국의 농업 정책과 같은 방향을 유지해야 하게 됐다. 이러한 WTO 체제하에서 비료 등 투입 자재에 대한 보조는 허용범위 내에서 단계적인 감축이 불가피했다.

 

1995년 생산량 430만톤 정점…70년대 3배
2000년대 소비·수출 감소로 가동률 64%
2008년 국제유가 폭등·바이오작물 생산 증가
세계적인 원자재가격 폭등으로 절감 정책
유기질비료·부숙유기질비료·녹비작물 지원 
무기질비료 생산량 급하락…요소생산 중단
2010년 시작 맞춤형비료 보조끊자 하락세
정부 정책 변화가 비료 소비패턴까지 좌우

 

우리나라 비료 정책은 국내·외 여건 변화에 따라 국내 식량의 자급도를 유지하면서 농업환경을 보전하고 안전 농산물을 공급하기 위한 친환경농업 지향형으로 재편하게 되었다. 과거 정부가 무기질비료를 농가에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해 비료 계정을 설치, 생산업체의 납품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구매해 농가에 공급하면서 비료 사용을 원활하게 했고 이로 인해 쌀에 있어서는 100%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됐다.


무기질비료 생산량을 198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구분해 생산현황을 분석해보면, 1970년대 생산량 130만톤에서 1995년 430만톤을 정점으로 3.3배 증가한 이후 매년 지속적으로 생산량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면서 2021년은 1995년 최고점 대비 46.7%가 감소한 229만톤을 나타냈다.


주요 시기별로 무기질비료 생산량을 분석해보면 1967년 복합비료 생산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주요 생산비종이 요소와 석회질소, 용성인비로 약 18만9000톤을 생산했다. 1967년 복합비료가 본격 생산되면서 점차 복합비료 생산량이 늘어났고 국내 무기질비료 자급을 달성하는 남해화학이 1977년 건설되면서 자급률은 200%를 상회해 약 130만~150만톤 정도의 무기질비료를 수출할 여력이 발생했다.

 


2000년대 접어들어 소비 감소와 수출 부진으로 비료산업의 가동율은 80%에서 2011년 64% 수준으로 지속 하락하였는데 이 시기 생산량은 2000년 373만톤에서 2011년 273만8000톤으로 약 100만톤의 생산실적이 줄어든 것이다.


2008년도 세계적으로 원자재가격이 폭등(100~200%)해 대농민 비료가격이 폭등, 정부는 하반기 보조금을 부활하기도 했다. 무기질비료 가격의 폭등으로 정부는 무기질비료의 대체비료로 부산물비료에 대해 정부 보조금을 확대했고 이로 인해 무기질비료의 소비량은 2008년 147만톤에서 2011년 110만톤으로 25% 감소하게 되었고 생산도 14% 감소하게 됐다.


국제 원자재가격 폭등으로 무기질비료 절감 대책이 제기됐고 이로 인해 무기질비료 절감 차원의 유기질비료, 부숙유기질비료(가축분퇴비 등), 녹비작물 대체에 대한 정부보조금 지급 등으로 무기질비료 생산업계는 경영압박이 가중되었고 산업 활성화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무기질비료는 국제 유가 급등과 국제 원자재가격 상승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국제 원유가격 상승시 농자재 가격상승 요인에 비해 비료가 받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자료가 발표되기도 했다. 국내 석유제품 가격이 5% 올랐다고 가정하면 농자재 전체는 3.97% 상승, 농약 0.13%, 농기계 0.15%, 종자 0.14%에 비해 비료는 0.27% 상승한다는 자료가 발표되기도 했다.


무기질비료는 2008년 국제 원자재가격 급등 사태를 겪은 일이 그 이후의 생산량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2008년 318만8000톤의 생산실적이 이후 크게 떨어져 2013년 257만7000톤을 기록한 이후 2021년까지 연 230만톤 가량의 생산을 하고 있다. 


무기질비료 생산실적을 질소·인산·칼리 성분별로 환산해 살펴보면 1980년 135만톤에서 1995년 178만톤으로 32%가 증가했고 2000년 155만톤으로 13%가 감소했는데 그 이후 감소세를 계속하여 2010년 100만톤으로 35%가 감소했으며, 2021년은 74만톤으로 26% 더 감소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요소 생산 원자재인 납사와 LPG가스 가격이 급등했고 국내 요소 생산비용이 원가를 넘어서면서 요소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요소의 비중은 5%로 떨어졌고 2012년 이후부터는 요소의 국내 생산을 중단하게 되었다. 

 


무기질비료의 비종별 생산실적을 보면 1980년대는 복합비료가 전체 52%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요소가 34%, 황산암모늄과 인산질·칼리질비료가 14%를 차지했다. 최대 생산량을 보였던 1995년에는 복합비료가 62%, 요소 20%, 황산암모늄 11%로 3개 비종이 전체의 93%를 차지했다.


2015년부터는 국내 생산 비종도 황산암모늄과 복합비료 생산체계로 변화하게 되었고 복합비료의 생산 비중은 황산암모늄의 생산량에 따라 73~80%를 나타내고 있다. 국내 생산량의 대부분을 복합비료가 차지하면서 단비 생산시설이 축소되고 주요 질소질비료의 원료인 요소, 인산질비료, 칼리질비료는 수입하여 공급하고 복합비료의 원료로 사용하는 생산체계로 변화하게 되었다.


국내 복합비료 생산실적도 정부 정책의 변화에 따라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쌀 증산을 위한 고농도 비종을 주로 생산하던 1995년까지는 비료 성분이 고농도인 21복합비료와 NK 웃거름 비료의 생산량이 많았다. 쌀 증산에서 품질로 전환되는 시점에서는 저농도 복합비료 생산체계로 전환되었다. 2008년 국제 원자재가격 폭등으로 인한 무기질비료 생산비용 증가로 비료가격이 폭등하면서 정부보조가 일시 부활되었던 시기의 맞춤형비료가 2010년부터 생산을 시작하여 2021년까지 유지되면서 매년 생산량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원예용 비료는 맞춤형비료 생산 초기에는 생산실적이 저조했으나 맞춤형비료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원예용비료가 1995년대 생산량 수준으로 다시 증가하면서 원예용비료 점유율이 전체 복합비료 생산 비중의 26%를 차지했다. 


또한 수출 부문에서도 2010년대 이후 국제 원자재가격이 급등하면서 국내 생산원가 상승에 따른 수출 가격경쟁력이 약화되었고 수출용 복합비료 생산실적이 2005년대 이전의 물량으로 회복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