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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의 農 에세이] 판이 바뀌면 좋겠네

-이상한 봄날


#1
이제 팬데믹(pandemic)이란 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원을 찾아봤더니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이 등장했다. 팬데믹은 ‘pan’과, ‘demic’의 합성어다. demic은 ‘사람’을 가리키고 pan은 ‘전체, 모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두산백과사전 외 다수의 용어사전). pan이란 음의 의미를 두루 찾아봤더니 언어별 공통점이 보였다.


- 그리스어 pan : 전체, 모두, 우주
- 라틴어 pan : 숲 ·들 ·목동의 신
- 독일어, 프랑스어 pan : 목축 ·숲의 신, 우주신
-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pan : 빵, 양식
- ‌산스크리트어, 한자문화권 汎 : 널리, 전체에 걸치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pan이라는 음은 두루 넓고 전체적인 느낌을 준다. 들판과 우주처럼 광대한 것을 말하는 한편 가장 기본적인 음식, 이를 주관하는 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전쟁의 신, 바다의 신, 술의 신, 아름다움의 신 등등 수많은 신이 있지만 먹거리를 책임지는 신보다 중요할까 싶다. 

  

우리말사전에는 ‘판’이 이렇게 정의돼 있다.
1. 일이 벌어진 자리. 또는 그 장면
2. ‘처지’, ‘판국’, ‘형편’의 뜻을 나타내는 말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난데없이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 바이러스의 질긴 시위를 보며 봄날의 햇빛을 새삼스럽게 음미하고 있다. 지구도 당황했나, 올해의 봄은 유난히 늦게 찾아와 급하게 떠날 듯하다. 


#2
지난 주 시골의 노모를 뵈러 갔다가 친구의 가게에서 안경을 맞추었다. 늘 여유 있고 잔잔하게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곤 하던 안경점 친구는, 좋아하는 탁구를 못 쳐서 갑갑한 것 외에는 다 괜찮다고 말했다. 안경을 맞추는 동안 이런저런 친구들 소식을 나누다가 조용히 혼잣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마스크만 잘 쓰면 되잖아. 비싸거나 구하기 힘든 게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냐. 이만하길 다행이지.”
당연하고 소소한 현실적인 얘기지만 사실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마스크가 아니라 귀금속이나 방제복 같은 게 필요했다면 어쩔~. “네 말이 명언이다” 하고 감탄했다.


“시골은 그나마 괜찮아. 집단적으로 뭘 하는 시대도 아니고, 들에 나가 일하는 게 일상이니 코로나 걱정은 훨씬 덜하지. 다 됐다, 한번 써볼래?”


안경을 씌워주고는 멀리 한번 보라고 권했다. 거울을 보고, 친구의 눈을 보며 만족감을 표했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조심해, 늘. 안경 벗을 때는 두 손으로 벗고. 그래야 오래 가.”


??? 나는 늘 한손으로 벗는 게 습관이 돼 있는데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혁명보다 어려운 게 습관 고치기 아닌가. 노모가 돌아가시면 시골 친구 찾아가기도 어려울 텐데, 걱정도 가지가지 한다며 귀경길에 올랐다. 이상한 시대이긴 하지만 그래도 봄인 것을, 새 안경을 쓰니 여실히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