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한 해 동안 실험에 동원되는 동물은 460만 마리에 이른다. 농림축산검역본부 집계를 보면, 2015년 약 250만 마리이던 것이 최근 1.8배 가까이 늘었다. 세계가 ‘동물실험 제로(0)’를 향해 빗장을 걸어 잠그는 사이에도 한국의 실험동물 수는 거꾸로 가파르게 늘어난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농약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살충제·살균제·제초제 같은 농약은 한 품목을 시장에 내놓기까지 가장 많은 실험동물을 ‘소모’하는 화학물질로 꼽힌다.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 등의 추산을 보면, 농약 원제(原劑) 한 품목을 정부 등록 기준에 맞추는 데만 쥐·토끼·개·물고기 등 7,400마리에서 많게는 2만 마리에 가까운 동물이 동원된다. 사람 건강에 대한 독성 자료를 갖추는 비용만 800만~1,600만 달러, 환경 영향까지 더한 전체 시험 비용은 식용작물용 농약 한 품목 기준으로 2억~3억 달러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
이 거대한 ‘동물 실험실’을 단계적으로 닫겠다는 흐름이 EU(유럽연합)와 미국에서 동시에 빨라지고 있다. EU는 지난달 ‘화학물질 안전성 평가의 동물실험 단계적 폐지 로드맵’을 공식 채택했고, 미국 식품의약국(FDA)도 올해 들어 신약 동물실험을 줄이는 지침을 잇달아 내놨다. 규제 선진국들이 ‘탈(脫) 동물’로 방향을 틀면서, 검증된 대체시험 자료를 갖추지 못한 농약·화학 제품은 수출 단계에서 사실상 비관세 장벽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한국이 마주한 건 윤리 문제이자 통상 문제이기도 하다.
농진청 2012년부터…입법은 부처 이견에 ‘답보’
한국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약 독성평가를 맡은 농촌진흥청은 이미 2012년 국내 생산 원제를 대상으로 급성 경구독성·피부 감작성 시험에 동물대체시험법을 도입했고, 다른 항목으로 확대를 모색해 왔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화장품법 개정으로 화장품 안전성 평가의 대체시험 전환을 마무리했으며, 환경부도 한국환경공단에 대체시험 시설을 갖추는 등 인프라를 넓히고 있다.
문제는 속도와 거버넌스(추진체계)다. 한 해 460만 마리에 이르는 실험동물 증가세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동물대체시험을 활성화하는 법 제정이 추진되고 있으나, 소관 부처를 둘러싸고 식약처와 환경부·농진청 사이의 이견으로 입법은 더딘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가 규제의 틀 자체를 바꾸는 동안, 한국은 첫발을 뗀 자리에서 좀처럼 보폭을 넓히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EU “10년간 1,500만 마리”… 숫자가 떠민 변화
변화의 압박이 어디서 왔는지는 EU 로드맵이 인용한 통계가 보여 준다. 2015년부터 2023년까지 EU에서 규제 목적으로 쓰인 실험동물은 1,500만 마리를 넘었고, 이 가운데 약 40%가 화학물질 안전성 평가에 투입됐다. 농약은 급성 독성, 반복투여독성, 발암성, 생식·발생 독성, 환경 생태독성까지 가장 광범위한 시험 묶음을 요구받는 품목이어서 이 ‘40%’의 상당 부분을 떠받치는 영역으로 지목된다.
EU 집행위원회 공식 홈페이지 등에 따르면, EU는 지난달 채택한 로드맵에 산업·소비자용 화학물질, 의약품, 식품·사료 첨가물은 물론 농약과 살균·방충용 살생물제(殺生物劑)까지 적용 대상 15개 분야를 나란히 올렸다. 화장품 동물실험 폐지를 요구하며 120만 명이 서명한 유럽시민발의(ECI)에 대한 화답이자 2025년 7월 발표된 EU ‘화학물질 행동계획’의 구체적 이행 조치이며, 기업이 직접 안전성 자료를 갖춰 등록하도록 한 EU의 화학물질 통합관리 제도 ‘REACH’를 뒷받침하는 성격이다.
EU 집행위는 22개 세부 실행과제를 3대 축으로 묶었다. △비동물 시험법의 개발·검증 가속(인체·환경 평가에서 동물실험을 대체·축소·개선할 30개 이상의 권고 포함) △연구·인공지능(AI)·데이터 기반 평가 활용 △분야를 가로지르는 협업 강화가 그것이다. 공동연구센터(JRC) 산하 EU 기준연구소의 실험 시설 개방, 규제상 필요를 식별하는 체계 도입, 비동물 접근법에 대한 EU·국제 표준 마련 등이 담겼다. 발표 직후 유럽화학물질청(ECHA)은 이해관계자 간 지식 공유를 위한 ‘동물대체시험 플랫폼’을 함께 가동했다. 로드맵은 즉시 이행하되, 2029년 고위급 회의를 열어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로 했다.
스테판 세주르네(Stephane Sejourne) 집행위 수석부위원장(번영·산업전략 담당)은 “이번 로드맵은 화학물질 안전성 평가를 현대화하는 동시에 유럽의 혁신 주도권을 강화하는 중대한 전환점”이라며 “동물실험을 단계적으로 폐지함으로써 더 높은 윤리 기준을 지키는 것은 물론 첨단 비동물 기술로 경쟁력까지 끌어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시카 로스발(Jessika Roswall) 환경 담당 집행위원도 “수십 년간의 동물실험을 끝내기 위한 구체적 발걸음”이라며 “동물과 환경, 기업 모두에 이로운 ‘삼중 승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쥐·토끼·개 자리에 ‘오가노이드·장기칩·AI’
동물을 대신할 기술의 윤곽도 분명해지고 있다. 시험관 내(in vitro) 인체 세포 모델, 인공장기(오가노이드), 사람 세포로 장기의 구조·기능을 재현한 ‘장기칩(organ-on-a-chip)’, 컴퓨터 시뮬레이션(in silico) 모델, 그리고 방대한 독성 데이터를 학습한 AI 예측이 핵심 수단으로 거론된다. 로드맵은 이런 ‘신접근법(NAMs·New Approach Methodologies)’을 통해 인체 건강·환경 평가에서 동물실험을 대체·축소·개선할 길을 30곳 넘게 제시했다.
농약 분야는 이 전환의 비용 효율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영역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급성 독성 시험 묶음(식스팩)을 비롯한 일부 항목을 비동물·전산 방식으로 전환하면 연간 2만 마리 이상의 동물을 줄일 수 있다고 추산한 바 있다. 피부 감작성 시험에 쓰이는 개량형 국소림프절검사(rLLNA)는 기존 방식 대비 동물 사용을 40% 줄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FDA도 ‘탈(脫) 동물’…규제의 세계화
EU의 행보는 대서양 건너 FDA의 움직임과 맞물려 규제의 ‘탈(脫) 동물’ 흐름을 가속하고 있다. 신약 개발 동물실험을 단계적으로 줄이겠다는 큰 방향을 공식화한 FDA는 올해 들어 구체적인 지침을 잇달아 내놨다. Regulatory Focus에 따르면, 지난 5월 동물실험을 비동물 대체법으로 전환하기 위한 초안 지침을 공개하며 기업들에 ‘장기칩’ 같은 시험관 내 인체 기반 시스템과 전산 모델링을 결합한 신접근법(NAMs) 도입을 검토하라고 권고했고, 지난 6월 1일에는 항암제 개발에 초점을 맞춘 별도의 초안 지침을 제안했다. 위험 기반 평가 방식을 적용하면 환자 안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항암제 개발 과정을 간소화할 수 있다는 게 FDA의 설명이다.
안젤로 데 클라로(Angelo de Claro) FDA 항암제최고전문센터(OCE) 국장은 “불필요한 동물실험을 없애고, 두 종(種) 대신 가장 적합한 한 종만 쓰거나, 동물실험을 근거 기반 접근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담았다”며 “더 효율적인 개발 절차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지침은 일부 항암제의 3개월 일반 독성시험에 초점을 두며, 항암제의 비임상 안전성 평가를 다룬 ICH(의약품 국제조화회의) ‘S9’ 가이드라인을 보완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영장류 시험을 줄이기 위해 축적된 사례도 근거로 삼았다. 의견 수렴은 7월 30일까지 진행된다.
해당 업계도 호응하고 있다. 유럽제약산업협회(EFPIA)는 “윤리적이고 과학에 기반한 혁신을 진전시키는 중요한 진전”이라며 EU 로드맵을 환영하고, 제약업계가 오랫동안 지지해 온 ‘3R’(대체-Replacement·축소-Reduction·개선-Refinement) 원칙의 가속화를 약속했다.
한국에 남은 시간…“통상 장벽 이전 ‘속도’ 필요”
다시 한국이다. 사실 국내 농약 제품의 EU·미국 수출은 아직 미미하다. 당장 수출길에 지장을 줄 사안은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전문가들은 EU·미국이 규제를 ‘탈 동물’로 재편하면, 비동물 시험 자료를 갖추지 못한 농약 제품이 머지않아 수출 단계에서 사실상 비관세 장벽에 부딪힐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규제 선진국이 채택한 시험 방식이 곧 국제 표준으로 굳어지는 흐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수출 비중이 작은 지금이 오히려 채비를 갖출 시간을 벌어 둔 시기라는 것이다.
EU가 2029년 점검 회의를 예고하고 미국이 분야별 지침을 빠르게 쏟아내는 만큼 국내 농약 업계와 규제 당국에도 검증된 대체시험법 확보와 데이터 축적이라는 ‘속도전’은 미뤄둘 수 없는 과제로 꼽힌다.
한 발은 뗐지만, 입법과 거버넌스는 아직 제자리인 우리 농약 업계. ‘동물실험 제로’를 향한 세계의 시계가 빨라질수록 ‘벌어 둔 시간’을 흘려보내는 비용도 함께 커진다는 지적이 나온다.